서울 강남의 초고층 사무실. 2015년 여름, 장 부장은 창밖을 내려다보며 《합병 동의서》를 손에 쥐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그는 27년 동안 이 회사에서 일해온 건설 엔지니어였다.
“선배, 괜찮으세요?” 후배 김 과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가가 붉어졌다. 1988년 입사 첫날, 스물네 살 청년이었던 그는 세계 최고의 건물을 짓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꿈은 이루어졌다. 2010년 두바이 사막에 솟아오른 부르즈 할리파, 828미터. 그는 그 구조 설계팀 일원이었다.
“우리가 말레이시아에서 페트로나스 타워를 세울 때도, 대만에서 타이페이 101을 올릴 때도,” 장 부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항상 이 회사가 자랑스러웠어. 1938년 이병철 회장님이 대구에서 시작한 작은 무역회사가 세계 최고의 건설사가 됐잖아.”
합병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룹 지배구조 개편이 필요했다. 제일모직과 합쳐 건설, 무역, 패션, 리조트를 아우르는 거대 종합상사가 탄생할 예정이었다.
“이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에요.” 김 과장이 말했다.
장 부장은 지갑에서 낡은 사진을 꺼냈다. 1995년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타워 현장.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아버지 역시 삼성물산 엔지니어였고 그 프로젝트 책임자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있어.” 장 부장은 사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가 짓는 건 건물이 아니라 한국의 자존심이라고. 삼성물산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우리 기술을 알리는 거라고.”
그날 밤, 장 부장은 회사에 남아 27년간의 프로젝트 자료를 꺼내보았다. 사우디 고속철도, 호주 LNG 플랜트,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샌즈. 각 프로젝트마다 동료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었다. 밤샘 회의, 수백 번의 설계 검토, 현장의 위험과 고난.
새벽 4시, 그는 동의서에 서명했다. 펜을 내려놓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 슬픔이 아니었다. 감사의 눈물이었다. 이 회사가 준 모든 것, 그가 바친 모든 것에 대한.
한 달 후 합병이 완료됐다. 새로운 삼성물산이 탄생했다. 장 부장은 여전히 같은 사무실에서 초고층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이제 그는 알았다. 회사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아래 모인 사람들의 열정이 진짜 유산이라는 것을.
2023년, 정년퇴임을 앞두고 그는 마지막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서울 강남 555미터 복합단지. 로비에 작은 명패가 걸렸다.
《삼성물산 건설부문 1938-2023: 세계를 잇는 꿈》
명패 앞에서 그는 중얼거렸다. “아버지, 우리 해냈어요. 이름은 바뀌었지만 꿈은 계속되고 있어요.”
이제 부장이 된 김 과장이 다가왔다. “선배님, 다음 주 사우디 프로젝트 입찰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장 부장은 웃었다. “당연하지. 우리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본 스토리는 가상의 인물과 기업을 배경으로 한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이나 기업과는 관련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