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08 · Vol. III · No. 28
a computer processor with the letter a on top of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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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오 나노미터의 기억

설계실 한쪽 구석에 오래된 형광등이 깜빡인다. 형광등 아래에서 김석준은 오늘도 거대한 모니터 두 대를 마주하고 앉아 있다. 서른다섯 해. 그 세월만큼 그의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졌고, 마우스를 쥔 오른손에는 가벼운 떨림이 생겼다.

반도체 대기업 실리콘 설계팀에서 전설처럼 불리는 이름, 김석준 수석. 그가 직접 손으로 그어낸 레이아웃 도면은 사내 박물관 코너 한쪽에 표본처럼 전시돼 있다. 55나노미터, 28나노미터, 그리고 7나노미터. 공정이 작아질수록 그의 이름은 커졌다.

그런데 오늘, 그 옆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최지안은 명문대 전자공학 석사를 갓 마치고 이 팀에 합류했다. 스물여섯. 노트북 바탕화면에는 AI 시뮬레이션 툴이 다섯 개 열려 있고, 대화창 하나엔 설계 자동화 모델이 밤새 돌아간 로그가 출력돼 있다.

“수석님, 저 이 블록 AI로 돌려봤는데요.” 최지안이 화면을 돌렸다. “열 손실 시뮬레이션이 3분 만에 나왔어요.”

김석준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화면을 들여다봤다. 숫자들은 정확했다. 그러나 그는 오른쪽 귀퉁이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네?”

“전류 밀도 분포. 모델이 이 영역을 균일하게 봤어. 그런데 실제 공정에서 이 구석은 식각이 살짝 당겨진다. 2퍼센트 정도.”

최지안은 눈썹을 모았다. “그게… 스펙 허용 범위 안 아닌가요?”

“맞아. 허용 범위 안이야.” 김석준은 잠시 멈췄다. “그런데 여름에 이 칩이 차량 탑재로 가면 외기 온도가 쉰 도까지 올라가. 허용 범위 안쪽이어도 조합이 되면 달라지거든.”

최지안이 손가락을 멈췄다. 화면 속 AI 모델은 그 조합을 본 적이 없었다.


점심 이후 두 사람은 같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오래된 폴리실리콘 저항 공정 자료를 함께 폈다. 그건 최지안이 태어나기도 전에 작성된 문서였다.

“이거 왜 아직도 쓰세요?” 최지안이 물었다. 웃음기가 섞였지만 진심이 담긴 질문이었다.

“데이터가 없는 시절에 사람이 어떻게 판단했는지 나와 있어서.” 김석준은 해당 페이지를 펼쳤다. “여기 봐. 수치가 아니라 엔지니어 감상이 적혀 있잖아. ‘공정 분위기가 습하면 이 층이 들떠 보인다.’ 이런 말들이야.”

최지안은 그 문장을 소리 없이 읽었다. 데이터셋에는 없는 언어였다.

“직관이요?”

“경험이지.” 김석준이 고개를 들었다. “직관은 근거 없는 느낌이고, 경험은 수만 번 틀리고 나서 남은 거야.”


퇴근 무렵, 최지안은 아까의 시뮬레이션 파일을 다시 열었다. 김석준이 짚어준 구석 부분에 새로운 조건 변수를 추가했다. 외기 온도 가변, 식각 오프셋 2퍼센트, 그리고 탑재 환경 열 모델. AI가 다시 돌아가는 동안 그는 옆을 봤다.

김석준은 종이 위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손 그림이었다. 레이아웃 스케치. 연필이 종이 위를 천천히 달렸다.

“저도… 그거 배울 수 있을까요?” 최지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석준은 잠깐 손을 멈췄다. 그리고 종이를 최지안 쪽으로 밀어줬다.

“앉아봐.”

두 사람의 그림자가 형광등 아래 겹쳐졌다. 바깥에서는 다음 공정 세대를 논하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3나노, 2나노. 숫자는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석 달 후, 최지안이 제출한 설계 보고서에는 이런 메모가 붙어 있었다.

차량 탑재 고온 환경 검토 항목 추가 — 현장 경험 기반.

그리고 보고서 끝 서명란 옆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검토: 김석준 수석.

김석준의 퇴직일은 그해 겨울이었다. 그가 짐을 싸던 날, 책상 서랍 안에서 낡은 폴리실리콘 공정 문서 한 부가 나왔다. 그는 그것을 최지안의 자리에 올려두고 나갔다.

최지안은 그 문서를 오래 들여다봤다. 페이지마다 연필 메모가 빼곡했다. 누군가의 세월이 거기 담겨 있었다.

바깥에서 팀 서버가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새로운 시뮬레이션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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