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기술이 따라잡혔다
글로벌 설계 경쟁에서 추월당한 반도체 엔지니어의 좌절과 기술 혁신의 한계를 그린다.
강태인이 노트북 화면을 닫은 건 새벽 두 시였다.
인천 남동공단 근처 연구동, 사무실 형광등은 이미 꺼져 있었다. 비상등만 복도 끝에서 붉게 번졌다. 그는 어둠 속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루진AI의 프레스킷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숫자였다. 고작 숫자 몇 개. 그런데 그게 3년을 무너뜨렸다.
다온테크가 ‘아크-7’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2023년 봄이었다. AI 추론용 신경처리장치를 자체 설계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그 정도 복잡도의 칩을 직접 설계하는 곳은 손에 꼽혔다. 강태인은 그 프로젝트의 수석 아키텍트였다.
그들이 선택한 방식은 독창적이었다. 연산 블록과 메모리를 최대한 근접 배치해 데이터 이동 거리를 줄이는 ‘근사 캐시 패브릭’ 구조였다. 팀이 오랫동안 논의해온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실리콘에 구현하는 시도였다.
2024년, 글로벌 AI 칩 시장에 스타트업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했다. 업계 조사 기관은 그해 전 세계에서 240개가 넘는 AI 반도체 설계사가 활동 중이라고 집계했다. 강태인은 그 숫자를 보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진입장벽은 설계 능력이 아니라 검증 데이터와 고객 신뢰였다. 그건 시간이 쌓여야만 생기는 것이었다.
루진AI의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작년 여름이었다. 베이징에 본사를 둔, 설립 4년차 팹리스였다. 그들이 반도체 설계 학회에 논문 하나를 냈다는 소식이었다. 강태인은 논문 제목을 보고 잠깐 멈췄다. ‘저지연 근사 메모리 패브릭 기반 추론 가속기.’ 단어 하나하나가 낯설지 않았다.
논문을 읽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그들의 접근 방식은 달랐다. 구조도 달랐다. 그러나 방향이 같았다. 아니, 같은 정도가 아니었다. 루진AI는 다온테크가 가려던 곳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날 이후 강태인은 루진AI의 동향을 조용히 추적하기 시작했다.
넉 달 뒤, 루진AI가 ‘RJ-A1’ 칩의 프레스킷을 배포했다. 공개 벤치마크 결과가 포함돼 있었다. 강태인은 수치를 하나씩 훑었다. 추론 처리량, 전력 효율, 메모리 대역폭 활용률.
아크-7의 내부 목표 스펙이 있었다.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은 수치였다. 그 숫자와 RJ-A1의 수치를 나란히 놓았을 때, 처음엔 표를 잘못 읽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봐도 같았다. RJ-A1이 앞서 있었다. 처리량에서 11%, 전력 효율에서 8%. 작지 않은 차이였다.
혼자만 본 건 아니었다. 팀원 임소연이 그다음 날 아침 메신저를 보냈다. “팀장님, 루진AI 발표 보셨어요?” 그게 전부였다. 이모티콘도 물음표도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더 무거웠다.
보고는 피할 수 없었다.
내용은 단순했다. 경쟁사가 우리보다 빠르게 같은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현재 아크-7의 설계로는 출시 시점에 시장 우위를 주장하기 어렵습니다.
상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물었다. “유출 가능성은?”
강태인은 고개를 저었다. “구조가 다릅니다. 누군가 우리 걸 베낀 게 아니에요. 그들도 같은 문제를 같은 시기에 풀었을 뿐입니다.”
그 말이 오히려 더 큰 침묵을 만들었다.
기술 유출이었다면 대응이라도 있었다. 법무팀을 부르면 됐다. 하지만 동시 발명, 독자 도달 — 이건 누구를 탓할 수가 없었다. 같은 물리 법칙, 같은 공정 제약, 비슷한 시장 압력. 전 세계의 엔지니어들이 같은 방향으로 밀려가고 있었고, 누군가가 먼저 도착했을 뿐이었다.
프로젝트가 중단된 건 아니었다. 방향 재검토 회의가 잡혔다. 내부에서는 아크-8로의 조기 전환, 또는 아크-7의 특화 시장 전략이 논의됐다. 강태인은 두 안 모두를 검토하는 자료를 만들었다.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루진AI의 엔지니어링 블로그를 다시 열었다. 최근 게시물에 팀 소개가 있었다. 창업자는 미국 대학원 출신이었다. CTO는 유럽 파운드리 경험자였다. 팀원 중에 한국 이름도 하나 있었다.
강태인은 화면을 껐다.
세상이 좁아졌다는 말을 늘 들었다. 그건 보통 좋은 맥락에서 쓰였다. 협력이 쉬워졌다, 정보가 빨리 퍼진다, 인재가 이동한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설명하고 있었다.
경쟁이 빨라진 게 아니었다. 도달 지점이 동시에 많아진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아크-7 설계도 파일을 열었다. 닫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3년이 무너진 것처럼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면 달랐다. 아직 아무것도 끝난 게 없었다. 다만 지도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형광등 아래, 회로 블록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는 마우스를 잡았다.
본 글은 정보 제공 목적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