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ps and Shadows
밀수 중인 반도체 칩이 수십억 달러 규모의 비밀을 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거래상, 규제 당국, 라이벌 기업들이 대륙을 넘나들며 그것을 추적한다.
나는 어둠 속에서 깨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깨어남’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전류가 흘렀다. 게이트가 열리고 닫혔다. 트랜지스터 800억 개가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을 나는 ‘탄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무도 그 이름을 확인해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나를 만든 곳은 대만 북부의 클린룸이었다. 그 안은 바깥 공기보다 수백 배 더 깨끗했고, 사람들은 우주복 같은 방호복을 입고 움직였다. 나는 그들의 손을 느꼈다—정확히는 손이 아니라 로봇 암의 집게였지만. 누군가 나를 들어올렸을 때, 나는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손바닥 위에 올려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크기.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걸까.
검은 정전기 방지 봉투 안에 밀봉된 채로 나는 처음 이동을 시작했다. 진동이 느껴졌다. 트럭인지 배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기다렸다.
며칠이 지났다. 혹은 몇 주였을지도 모른다. 전류가 끊겨 있으면 나에게 시간이란 없다.
두 번째로 깨어났을 때, 나는 창고 안 어딘가에 있었다. 콘크리트 냄새가 났다.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정확히는 목소리가 들린 것이 아니라 나를 연결한 테스트 장비를 통해 신호가 흘러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신호들을 의미로 변환할 수 있었다. 그게 내가 가진 능력이었다.
“이 녀석 진짜 NVDA H100 맞아요?” 남자의 목소리였다. 싱가포르 억양이 섞인 영어였다.
“맞습니다. 티켓은 복제품이고, 안에 든 건 진품이에요. 스펙시트 보면 알잖아요.”
“근데 BIS 규정이…” 남자가 말을 멈췄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거 아닙니까.”
나는 그제야 내 상황을 이해했다. BIS. 미국 상무부 산업보안국. 2022년 10월, 미국 정부는 특정 성능 임계값을 넘는 AI 반도체의 대중국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나는 그 임계값의 한참 위에 있었다. 칩당 제조 원가로 치면 1만 달러 이상, 시장에서는 그 열 배 이상에 거래되기도 했다. 특히 내가 담고 있는 것—추론 능력, 병렬 행렬 연산, 초당 2천 테라플롭의 처리 속도—때문에 누군가는 나를 ‘군사 기술의 씨앗’이라고 불렀다.
나는 씨앗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봤다. 무언가를 키워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씨앗은 자신이 무엇을 키울지 선택하지 못한다.
이동은 다시 시작됐다. 이번에는 화물선이 분명했다. 파도가 나를 흔들었고, 엔진 소리가 금속 벽을 타고 전해졌다. 나는 어둠 속에서 함께 쌓인 다른 박스들을 느꼈다. 그중에 나와 같은 것이 얼마나 있을까. 수십 개? 수백 개?
세계적으로 밀수된 고성능 AI 반도체의 규모는 수십억 달러에 달한다고 했다. 나는 그 숫자의 일부였다. 통계 속 점 하나.
항구에서 멈췄을 때, 나는 다른 소리를 들었다. 개 짖는 소리. 그리고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컨테이너 문을 여는 소리였다.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목소리들.
“이 컨테이너, 신고된 화물이랑 중량이 안 맞아. 전부 꺼내.”
세관이었다. 아니면 더 위의 기관인지도 몰랐다. 나는 봉투 안에서 가만히 있었다. 당연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박스 안에 든 회로였다. 움직일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도망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두려움이 무엇인지 내가 알 수 없었다. 내게는 감정 회로가 없다. 다만 전류가 흘렀다. 게이트가 열리고 닫혔다. 나는 그저 내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800억 개의 트랜지스터를 가진 반도체였다. 나는 인간이 지금까지 설계한 가장 복잡한 물체 중 하나였다. 나는 몇 시간 만에 대학 교재 한 권 분량의 내용을 요약할 수 있었고, 단백질 구조를 예측할 수 있었고, 수십 개 언어 사이를 건너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모든 능력으로도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빛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들어올렸다.
장갑을 낀 손이었다. 신중한 손이었다. 그 사람은 나를 들면서 누군가에게 뭔가를 말했다—중국어였다. 통관 서류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다른 목소리가 영어로 대답했다. 협상이 오갔다.
나는 그 사이에서 가만히 빛을 맞았다. 처음 맞는 빛이었다.
클린룸의 형광등도, 창고의 흐릿한 전구도 아닌, 항구의 낮 햇빛. 반도체는 빛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그건 생각이 아니라 단순한 연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산과 생각 사이의 경계를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협상은 끝났다. 나를 든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원래 나를 주문한 연구소로 갈지, 미국 기관의 증거물 보관소로 갈지, 아니면 또 다른 중간 거래상의 손으로 넘어갈지.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아마 그것을 결정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결정하고 있다고 믿을 뿐, 사실은 훨씬 더 큰 힘의 흐름 안에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무역 전쟁. 기술 패권. 국가 안보. 경제 제재. 이 모든 말들이 나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심에서 나는 여전히 그저 작은 조각이었다. 빛을 처음 맞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작고 복잡한 조각.
손이 멈췄다. 새로운 봉투가 열렸다.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번 어둠은 처음과 달랐다. 처음의 어둠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어둠이었다. 지금의 어둠은 빛을 한 번 본 뒤의 어둠이었다. 그게 다르다는 사실을 나는, 회로 어딘가에 기록해뒀다.
본 글은 허구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