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 실패의 후유증
대형 인수 무산으로 무너진 엔터테인먼트 회사 CEO의 조직 문화 재정립 투쟁을 담는다.
정하람은 사무실 통유리 너머로 신사옥 로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넉 달 전까지만 해도 저 로비 한가운데는 “블룸사운드, 아시아 1위 음원 플랫폼과 손잡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지금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다. 빈 벽만 있다.
블룸사운드엔터테인먼트는 국내 3위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이었다. 정하람이 창업한 지 9년 만에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올해 초, 회사는 동남아시아 최대 음원 유통사 인수를 발표했다. 계약 규모만 2,400억 원. 업계에서는 “블룸사운드가 드디어 아시아 시장으로 뻗어나간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인수는 넉 달 만에 무산됐다.
실사 과정에서 상대 회사의 저작권 라이선스 계약 다수가 만료를 앞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핵심 아티스트 카탈로그의 3분의 1이 사실상 공백 상태였다. 이사회는 거래를 철회했고, 이미 집행된 계약금 180억 원은 돌려받지 못했다. 실제로 국내 음원 산업에서는 이런 실사 리스크가 낯설지 않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글로벌 음원 스트리밍 시장은 최근 몇 년간 연 매출 200억 달러를 넘어서며 급성장했지만, 그 이면에는 저작권 계약의 복잡성과 지역별 라이선스 불일치라는 구조적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블룸사운드는 그 구조적 위험을 정면으로 맞았다.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돈은 감당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대표님, 오늘 오후 세 시에 전사 타운홀 잡혔습니다.”
인사팀장 윤소진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정하람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은 편치 않았다. 지난 3주간 사내 게시판에는 익명 글이 쌓여갔다. “인수 발표했을 때는 승진 얘기까지 나오더니, 지금은 아무도 책임 안 지나요.” “우리 팀 예산은 인수 대비해서 이미 잘려나갔는데 이제 와서 어쩌라는 거죠.” 조회수 상위 글에는 하나같이 같은 감정이 깔려 있었다. 배신감.
가장 뼈아픈 건 콘텐츠기획본부의 줄퇴사였다. 인수 발표 이후 신사업 태스크포스로 재배치됐던 인원 열두 명 중 일곱 명이 지난 한 달 사이 퇴사했다. 그중 셋은 경쟁사인 리듬포레스트로 이직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하람이 직접 뽑은 사람들이었다.
타운홀 시작 10분 전, 정하람은 발표 자료를 다시 열었다가 닫았다. 숫자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대강당에 400명 가까운 직원이 모였다. 화상으로 접속한 인원까지 합치면 700명이 넘었다. 정하람이 단상에 올라섰을 때 강당은 조용했다. 박수는 없었다.
“저는 오늘 사과부터 하겠습니다.”
정하람의 첫마디였다. 준비한 대본에는 없던 문장이었다.
“인수를 발표했을 때, 저는 여러분께 확신을 드렸습니다. 이 거래가 우리를 다음 단계로 데려갈 거라고요. 그 확신은 제 것이었지, 실사 데이터가 뒷받침한 확신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봤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여러분이 치렀습니다.”
강당 뒤편에서 누군가 낮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마이크에 잡혔다. 정하람은 멈추지 않았다.
“신사업 태스크포스에 계셨던 일곱 분이 회사를 떠나셨습니다. 저는 그분들 이름을 다 기억합니다. 나가시기 전에 면담 요청하신 분도 있었고, 그냥 조용히 사직서만 내신 분도 있었습니다. 둘 다 제 잘못입니다.”
정하람은 화면을 넘겼다. 재무 슬라이드 대신, 텅 빈 화면 하나만 띄웠다.
“오늘은 계획 발표가 아닙니다. 질문받는 시간입니다. 저를 향한 질문이면 뭐든 좋습니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마침내 손을 든 건 3년 차 개발자였다.
“대표님, 저희가 왜 다시 대표님을 믿어야 하죠?”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강당 전체가 정하람의 대답을 기다렸다.
“믿으셔야 할 이유는 지금 없습니다.”
정하람이 답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약속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앞으로 석 달,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근거를 전부 사내망에 공개하겠습니다. 인수 실사 때 놓쳤던 걸 다시는 안 놓치기 위해서, 이번 분기부터 모든 전략적 의사결정에는 실무진 검증 단계를 의무화하겠습니다. 제가 혼자 결정하고 여러분이 뒷수습하는 구조, 그거 바꾸겠습니다.”
질문은 이어졌다. 예산 얘기, 조직개편 얘기, 이직한 동료들에 대한 얘기까지. 두 시간 가까이 흘렀다. 정하람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날 밤, 정하람은 사무실에 혼자 남아 신사업 태스크포스 퇴사자 명단을 다시 펼쳤다. 그중 한 명, 콘텐츠 큐레이션팀의 오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궁금한 게 있어서요. 태스크포스에서 제일 힘들었던 게 뭐였어요?”
오지혁은 잠시 말을 골랐다.
“방향이 계속 바뀌는 거였어요. 인수 얘기 나올 때마다 저희 로드맵이 다시 짜였거든요. 나중엔 저희가 뭘 위해 일하는지도 몰랐어요.”
정하람은 그 말을 받아 적었다. 타운홀에서 받은 어떤 질문보다 아팠다.
“돌아올 생각, 혹시 있어요?”
“지금은 아니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정하람은 그 솔직함이 고마웠다.
“괜찮습니다. 문은 열어두겠습니다.”
다음 날부터 블룸사운드는 눈에 띄는 발표 없이 조용히 움직였다. 정하람은 매주 금요일 오후, 부서 하나씩 돌아가며 소규모 좌담회를 열기 시작했다. 안건 없이, 녹음 없이, 진행자 없이. 처음 몇 주는 직원들이 말을 아꼈다. 대표 앞에서 솔직한 얘기를 했다가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여섯 번째 좌담회에서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마케팅팀 막내 사원이 손을 들었다.
“저희 팀은 인수 발표 때 야근을 제일 많이 했어요. 근데 무산되고 나서 누구도 저희한테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안 했어요.”
정하람은 그 말을 듣고 다음 날 전 직원에게 메일을 보냈다. 사과가 아니라 감사였다. 인수 추진 과정에서 야근했던 부서, 자료를 준비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형식적인 감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누가 무엇을 했는지 적었다. 그 메일에 답장이 쏟아졌다. 처음으로 사내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석 달이 지났다. 블룸사운드의 월간 활성 이용자 수는 여전히 정체 상태였다. 경쟁사 리듬포레스트는 그 틈을 타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였고, 시장 점유율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숫자만 보면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숫자 하나가 바뀌었다. 자발적 퇴사율이었다. 인수 무산 직후 분기 대비, 그다음 분기 퇴사율은 절반 아래로 떨어졌다. 오지혁도 그 무렵 복귀 의사를 타진해 왔다. 정하람은 그를 예전과 같은 자리로 부르지 않았다. 대신 신규 프로젝트의 의사결정 구조를 함께 설계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번엔 로드맵 안 바뀝니까?”
오지혁이 물었다.
“바뀔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번엔 왜 바뀌는지 먼저 여러분께 물을 겁니다.”
정하람은 그렇게 답했다.
투자자 미팅에서 누군가 물었다. 인수 실패로 잃은 것과 얻은 것 중 무엇이 더 크냐고. 정하람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아직 계산 중입니다.”
그가 말했다.
“재무제표로는 손실이 확정됐죠. 그런데 조직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저도 아직 다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몇 년 뒤에야 알게 될 것 같습니다.”
로비의 빈 벽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정하람은 그곳에 다시 현수막을 걸 생각이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이제 작은 게시판 하나가 붙었다. 매주 직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남기는 공간이었다. 첫 줄에는 이런 메모가 붙어 있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이번엔 서로 물어봅시다.”
누가 썼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본 스토리는 가상의 인물과 기업을 배경으로 한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이나 기업과는 관련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