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바다에서
환매가 몰린 주, 가공의 자산운용사 매니저가 오래된 고객에게 손실을 설명하러 간다. 실제 기업·티커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수현이 초인종을 누른 건 세 번째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복도 끝까지 걸어갔다. 501호. 서류 봉투가 손 안에서 이미 땀을 먹고 있었다. 11층짜리 구식 아파트. 창밖으로 한강이 보인다는 게 이 집의 자랑이라고 처음 방문했을 때 들었다. 그때도 봄이었다.
“누구세요.”
“새물자산운용 이수현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체인 풀리는 소리가 말을 끊었다.
오명철은 예순여덟이었다. 고등학교 지리 교사로 삼십 년을 보낸 뒤 은퇴했고, 퇴직금과 아내의 보험금을 합쳐 이수현의 펀드에 맡긴 게 사 년 전이었다. 아내는 이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거실은 깨끗했다. 벽에는 낡은 지도가 하나 걸려 있었다. 탁자 위에는 아직 김이 오르는 차 두 잔. 수현이 온다는 걸 알고 미리 끓여둔 것이었다. 그 사실이 수현의 가슴 어딘가를 천천히 눌렀다.
“앉아요.”
수현은 소파 끝에 허리를 세웠다. 서류 봉투를 열었다.
“선생님, 이달 운용 보고서 드리러 왔습니다. 3월 한 달 기준으로—”
“얼마나 빠졌어요.”
오명철의 목소리에는 날이 없었다. 단지 알고 싶다는 투였다.
“포트폴리오 평가액 기준 12.4퍼센트입니다.”
“한 달에.”
“네.”
수현은 서류를 탁자에 내려놓지 않았다. 손에 쥔 채로 설명을 이어갔다.
3월은 그해 들어 가장 혹독한 주가 두 번 겹쳤다. 글로벌 단기금리가 예상보다 더 오래, 더 높이 머문다는 신호가 연달아 나오면서 기관 투자자들이 일제히 환매를 신청했다. 새물자산운용이 운용하는 중소형 성장주 펀드에서만 그 주에 370억 원 이상이 빠져나갔다. 규모가 문제가 아니었다. 타이밍이었다. 환매 자금을 마련하려면 보유 주식을 팔아야 했고, 팔아야 할 날이 하필이면 지수가 바닥을 찍던 사흘이었다.
“좋은 종목도 팔았어요?”
“네.”
수현은 거기서 잠깐 멈췄다.
“저희가 장기 보유 중이던 몇 가지도 어쩔 수 없이 처분했습니다. 환매에 응하려면 현금이 필요했고, 시장이 무너지던 날에 팔았습니다. 싸게.”
오명철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수현을 바라보는 눈이 부드러웠다.
“당신도 힘들었겠네.”
수현은 그 말을 준비하지 않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선생님 자산이 문제지요.”
“나는 지금 당신 걱정을 하고 있어요.”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오후 햇살이 물 위에 흩어지고 있었다. 수현은 겨우 서류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서류 모서리를 잡은 채 한참 동안 떠나지 않았다.
사 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오명철은 퇴직금 통장 잔고를 수현 앞에 펼쳐 보이면서 물었었다. 이게 제 아내와 제가 삼십 년 동안 모은 겁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수현은 그날 두 시간 동안 펀드 설명을 했다. 수익률 이야기보다 위험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오명철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겁을 주는 사람이 제일 믿을 만하다고.
“선생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게 당신한테 왜 중요해요.”
“제가 운용을 맡고 있으니까요.”
“그것 때문에 직접 여기까지 왔어요?”
수현은 말을 멈췄다. 봉투와 서류, 지하철 두 번 갈아탄 길, 복도에서 초인종을 세 번 누르며 망설인 것. 전화로 해도 되는 일이었다.
“그게 다 이유인 건 아닙니다.”
오명철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 돈이 아내 거라고 생각해요. 보험금이 절반이니까. 그래서 손해가 났다고 겁먹고 빼면, 그게 더 잘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어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맞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마음, 들었습니다.”
“이수현 씨, 당신은 몇 살이에요.”
“서른다섯입니다.”
“그럼 내 딸뻘이네. 나한테 이렇게까지 직접 오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아요?”
“그게…”
“없어요. 아마 없을 거야. 전화로 하면 되는 걸 왜 여기까지 왔어요. 봉투 들고.”
수현은 대답을 찾지 못했다. 찻잔이 식어가고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명철이 낮게 웃었다.
“그 말이 제일 솔직하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강 쪽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지도 속 어딘가에 오명철이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가르쳤을 산과 강이 있을 것이었다.
수현이 일어서려는 순간 오명철이 말했다.
“그 펀드, 계속 넣어둘게요. 당신이 운용하는 동안은.”
그게 조건인지, 믿음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수현은 한참을 생각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도, 1층에 내려서 바깥 공기를 마시면서도. 봉투는 탁자에 그대로 두고 왔다. 오명철이 혼자 천천히 읽을 수 있도록.
한강은 여전히 빛을 받고 있었다.
본 글은 허구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