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건물에 피는 꽃
팬데믹 이후 방치된 오피스 건물을 주거·문화공간으로 되살리려는 건축가와 주민, 그리고 개발사 사이의 신뢰와 상처의 교감.
창문마다 먼지가 앉아 있었다.
11층짜리 건물의 로비에 발을 들이자마자 건축가 이설은 그것을 알았다. 2층까지 뻥 뚫린 공간에 녹슨 조명 레일이 매달려 있었고, 카운터 뒤 벽에는 오래된 회사 로고 자국이 사각형으로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누군가 간판을 떼어내면서 그 자리만 벽지 색깔이 달랐다.
“2020년 이후 계속 비어 있습니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서류 뭉치를 옆구리에 낀 남자가 서 있었다. 삼십 대 중반쯤.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눈 아래는 다크서클이 짙었다.
“김준서 씨요?”
“네. 새빛개발 자산관리팀입니다.” 그는 명함을 내밀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는 이 방향에 회의적입니다. 주거 전환보다 철거 후 재건축이 수익성이 훨씬 높아요.”
이설은 명함을 받으면서도 천장을 올려다봤다.
“여기 준공이 언제예요?”
“1991년입니다. 33년 됐네요.”
“그럼 이 건물, 외환위기도 버텼고 금융위기도 버텼다는 거네요.”
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파일을 펼쳐 무언가를 확인했다.
사흘째 되는 날, 이설은 혼자 4층에 올라가 있었다.
허가 없이 올라간 것이었지만, 아래층 어딘가에서 준서가 모른 척 해주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발소리를 내지 않았으니까.
4층 한쪽 벽에는 낡은 화이트보드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손글씨로 2019. 12. 31. 안녕!이라고 써져 있었다. 바로 아래에는 아무도 지우지 않은 회의 내용이 빼곡했다. ‘2분기 목표’, ‘마케팅 예산’, ‘신규 채용 계획’. 그 날짜로부터 석 달 뒤에 세상이 멈췄다.
이설은 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거기 있었군요.”
준서가 계단참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캔 커피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올라오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직원이니까요.” 그는 이설 옆에 서서 화이트보드를 함께 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도 처음 여길 맡았을 때 이거 봤어요. 지우려고 했는데 못 지웠습니다. 왜인지 모르겠어요.”
이설은 그를 옆에서 슬쩍 봤다. 그가 캔 커피 하나를 내밀었다.
“주거 전환이 수익성이 낮다고 하셨는데요,” 이설이 말했다. “단기로 보면 맞아요. 그런데 팬데믹 이후 이 지역 오피스 공실이 4년 넘게 이어지고 있잖아요. 철거 허가 나는 것도 2년은 더 걸릴 텐데, 그 사이에 건물이 더 낡으면 철거 비용도 올라가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럼요?”
준서는 캔을 열면서 바닥을 내려다봤다.
“알고 있어도, 회사가 원하는 방향이 따로 있으면 제가 뒤집을 수 없어요. 저는 그냥 맡겨진 사람입니다.”
이설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맡겨진 사람. 그녀도 그랬다. 의뢰가 들어와서 온 것이고, 의뢰인이 철거를 결정하면 그녀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사흘째 이 건물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1층에 기둥 간격이 특이하게 넓어요,” 이설이 말했다. “90년대 초 설계치고는 요즘 트렌드에 맞는 구조예요. 카페나 갤러리를 놓기에 최적입니다. 2층부터 5층은 복층 주거로 전환하면 층고도 충분하고요. 옥상은 남쪽으로 열려 있어서 텃밭 조성도 가능해요.”
준서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이미 다 재봐두셨네요.”
“3일 동안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그가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4층 유리창 너머로 인근 골목의 지붕들이 보였다. 기왓장을 얹은 낡은 건물들, 그 사이에서 누군가 빨래를 널고 있었다.
“이 건물 주변에 오래 사신 분들이 좀 있어요,” 준서가 말했다. “아랫집 주민들이 여기 안을 보려고 유리창에 손을 대는 거 봤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러나 싶었는데.”
“안 궁금해요?”
“글쎄요.” 그는 캔을 다 비우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런 건물을 살려본 적 있어요?”
“한 번 있어요. 인천에서 창고를 고쳤는데, 지금은 독립서점이 들어와 있어요.”
“거기도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훨씬 더 걸렸어요.” 이설이 조금 웃으며 말했다. “3년이요.”
준서가 그녀를 봤다.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쳤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이설은 새빛개발 사무실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슬라이드 열다섯 장. 1층 커뮤니티 홀, 25층 주거 열두 세대, 68층 공유 오피스, 옥상 정원. 초기 투자 대비 회수 기간은 7년. 철거 후 재건축의 수익이 더 크다는 건 맞았지만, 기간은 거의 두 배였다.
임원진은 말이 없었다. 한 명이 안경을 고쳐 쓰며 슬라이드를 다시 보자고 했다.
준서는 회의실 한쪽 벽에 기대서, 메모를 하는 척 그녀를 봤다.
발표가 끝나고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는 짧게 말했다.
“잘 하셨어요.”
“결정은요?”
“아직 모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걸어갔다. 이설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느슨하게 묶인 넥타이, 서류를 한쪽 겨드랑이에 낀 자세. 맡겨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이설은 다른 프로젝트 도면을 펼쳐놓고 앉아 있다가, 서랍에서 그 건물 사진들을 꺼냈다. 4층 화이트보드, 로비 녹슨 조명 레일, 기왓장 지붕들이 보이는 창밖. 그것들을 한 장씩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전화기가 울렸다.
“이설 씨, 저 준서입니다.”
“네.”
“회사에서 결정이 났어요.”
그녀는 숨을 참았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저도 아직 다 모릅니다. 그런데, 1층 커뮤니티 홀 설계 좀 더 구체적으로 봐줄 수 있어요? 임원 중 한 명이 그 부분에 관심이 생겼다고 해서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됩니까?”
“네,” 이설이 말했다. “됩니다.”
전화를 끊고, 그녀는 테이블 위 사진들을 다시 내려다봤다. 4층 화이트보드의 손글씨. 안녕이라고 쓴 사람은 이미 떠났지만, 그 글씨는 아직 거기 있었다.
비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건물은 아직 비어 있었다.
본 글은 정보 제공 목적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