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08 · Vol. III · No. 28
Wall Street financial district at golden h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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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
GLOBAL

마지막 브로커

여의도 금융 거리의 마지막 브로커가 AI 알고리즘과 대면하는 마지막 주. 32년의 경험과 기계의 논리 사이에서 한 인간의 선택.

· 5분 읽기 · #스토리#멜로

마지막 브로커

서울 여의도 63빌딩 33층. 강변북로 건너편 한강은 오후 햇살을 받아 납빛으로 반짝였다. 유리창 모서리에 낀 먼지가 빛의 각도에 따라 금가루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민재는 책상 앞에 앉아 두 손을 모은 채 그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이 방은 세 번 리모델링됐고, 동료들은 스물여섯 명이 그를 앞서 퇴직했다. 오늘은 그가 남은 마지막 주의 첫날이었다.

책상 위에는 모니터 두 대가 놓여 있었다. 왼쪽은 호가창. 숫자들이 초당 수십 번 깜빡였다. 오른쪽은 회사가 지난해 도입한 AI 리밸런싱 시스템 AlgoSync의 대시보드였다. 빨간 막대와 파란 막대가 교차하며 리스크 점수를 실시간으로 갱신했다. 이민재는 오른쪽 화면에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녀는 삼십이 년을 이 자리에서 보냈다. 1993년 처음 입사했을 때는 주문을 전화로 받았다. 고객이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를 높이면 그 목소리의 온도가 포지션의 크기를 알려줬다. 패닉에 빠진 목소리, 인내심이 고갈된 침묵, 그리고 가끔씩 찾아오는 고요하고 무거운 확신의 목소리. 그것들은 데이터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사람이었다.

AlgoSync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화요일 오전, 박기호의 전화가 왔다.

박기호는 이민재의 고객 중 가장 오래된 이름이었다. 이십 년이 넘었다. 처음 찾아왔을 때 그는 마흔셋이었고, 부천에서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소규모지만 안정적이었다. 그는 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모른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솔직함이 이민재는 마음에 들었다.

“선생님, 저 기호입니다.”

목소리가 낮았다. 이민재는 전화기를 귀에 더 가까이 가져갔다.

“무슨 일이에요.”

“인쇄소를 넘겼어요. 지난달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민재는 서랍에서 메모지를 꺼내 펜을 들었다. 습관이었다. 디지털로 기록된 것들은 어쩌면 무게감이 달랐다.

“얼마나 받았어요?”

“세후 11억 조금 넘어요. 이게 전부예요. 퇴직금 포함해서.”

11억. 이민재는 숫자를 적었다. 그 옆에 박기호의 나이도 썼다. 예순다섯.

“그래서요.”

“그 돈으로 한 번 더 해보고 싶어요. 제 손으로.”

이민재는 창밖을 봤다. 한강 위로 유람선 한 척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 시장이 어떤지 알고 있어요?”

“알아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전화한 거예요.”


박기호가 사무실에 온 것은 다음날 오후였다. 그는 예전보다 살이 빠져 있었고, 머리카락이 많이 셌다. 그래도 눈빛은 여전히 같았다. 무언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눈. 회피하지 않는 눈.

이민재는 그에게 커피를 내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어디에 넣고 싶으세요?”

박기호는 가방에서 신문 기사 스크랩 하나를 꺼냈다. 이민재는 속으로 웃음이 났다. 여전히 종이였다.

“이거 읽었어요. 이차전지 소재 쪽.”

기사는 2025년 하반기 이후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 재편에 관한 것이었다. 국내 양극재 기업 하나가 북미 완성차 업체와 예비 계약을 맺었다는 내용. 계약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업계 추정치는 3조 원 이상이었다. 이민재도 읽은 기사였다.

“어느 종목이요.”

박기호는 손가락으로 기사 하단의 기업명을 짚었다. QuantumMat이었다.

QuantumMat은 이민재가 잘 아는 이름이었다. 이 회사는 2022년 리튬 공급 대란 당시 한 번 크게 주목을 받았다가 이후 조용해진 중형 소재주였다. 최근 주가는 52주 저점 근처에서 횡보 중이었다. AlgoSync 대시보드에서 이 종목의 리스크 점수는 높았다. 변동성 지수, 유동성 비율, 공매도 잔고. 숫자들은 모두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기계는 뭐래요?” 박기호가 오른쪽 모니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민재는 화면을 한 번 봤다. AlgoSync는 QuantumMat에 대해 ‘리스크 상위 12%’ 판정을 내리고 있었다. 매수 신호 없음.

“기계는 아니라고 해요.”

“선생님은요.”

그것이 문제였다.


이민재는 그날 밤 늦게까지 자리에 있었다. 사무실에 사람은 없었고 AlgoSync 대시보드만 조용히 숫자를 갱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래된 파일 캐비닛을 열었다. 종이 서류들이 빼곡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의 손으로 쓴 메모들, 통화 기록들, 고객 상담 노트들.

2003년 카드 대란 당시 메모가 있었다. 당시 모두가 금융주를 던졌다. VKFN이라는 소형 캐피탈 회사였다. 숫자만 보면 가망이 없었다. 그런데 그 회사 대표와 통화한 기록이 있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메모. 이민재는 그 직감을 믿었고, 고객 두 명에게 조심스럽게 권했다. 두 달 뒤 그 회사는 살아남았다.

AlgoSync는 2003년을 학습했다. 하지만 그 대표의 목소리를 학습하지는 못했다.

이민재는 파일을 덮었다. 창밖 한강은 이제 어두웠다.

그녀는 박기호에 대해 생각했다. 이십 년. 그가 처음 인쇄소 계약서를 들고 왔을 때, 그의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진지함의 표시였다. 그녀는 그것을 알아봤다. 그리고 그 이후 이십 년 동안 그 판단이 틀린 적이 없었다. 그는 손실을 봤을 때도 침착했고, 수익을 냈을 때도 냉정했다. 그는 도박을 하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박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자본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문제는 시장이 진지함을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목요일, 이민재는 박기호에게 전화를 했다.

“기호 씨, 내가 기계 말을 거스를 수는 없어요.”

전화 너머가 잠시 조용했다.

“알아요.”

“그런데 내가 드릴 수 있는 말이 있어요.”

이민재는 책상 위의 메모지를 봤다. 어젯밤 쓴 것들이 있었다.

“QuantumMat의 숫자가 나쁜 건 맞아요. 공매도도 많고, 주가 흐름도 불안해요. 기계가 싫어하는 종목이에요.”

“그런데요.”

“그런데 그 예비 계약 상대방 회사가 북미에서 보조금 문제로 공장 허가를 기다리고 있어요. 나온다면 3분기 안에 나와요. 안 나오면 그냥 끝이고요.”

“그 허가가 나올 것 같아요?”

이민재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모르겠어요. 솔직히.”

다시 침묵.

“근데 기계는 그 허가가 안 나온다고 가정하고 계산하는 거예요. 허가가 나온다는 건 숫자에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선생님은요. 나온다고 생각해요, 안 나온다고 생각해요.”

이민재는 창밖을 봤다. 한강이 낮게 빛났다.

“저는 기업이 허가 여부를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기호 씨가 이십 년 동안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기호 씨는 잃어서는 안 되는 돈에 손대는 사람이 아니에요. 지금 전화한 게 그거 아닌가요. 이게 아니어도 살 수 있는지 확인하러 온 거잖아요.”

전화 너머에서 긴 숨소리가 들렸다.

”…맞아요.”

“그러면 그 대답은 기계가 해줄 수 있어요. 잃어도 되는 범위 안에서 하세요. 기계도 그 계산은 잘해요.”

박기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민재도 기다렸다.

“선생님, 이번 주가 마지막이죠.”

“네.”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민재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고맙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이 나왔다.

“기호 씨도요.”


금요일 오후, 이민재는 책상을 정리했다. 손으로 쓴 메모들은 대부분 버렸다. 몇 장만 봉투에 넣어 챙겼다. AlgoSync 대시보드는 오늘도 조용히 숫자를 갱신하고 있었다. QuantumMat의 리스크 점수는 어제보다 조금 낮아져 있었다. 이민재는 그 숫자를 보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퇴근하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후배 직원 하나가 옆에 섰다.

“선생님, 정말 가시는 거예요?”

이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다 알고리즘이 하는 거 아닌가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렇겠지.”

이민재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면서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예상보다 평온했다. 서른두 해 동안 이 도시의 숫자들과 함께 있었다. 그 숫자들 속에서 사람의 두려움과 희망과 어리석음과 진지함을 읽어왔다. AlgoSync는 그것을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할 것이다. 어쩌면 이민재가 틀린 적이 있는 부분에서도 맞을 것이다.

그래도 박기호의 목소리 온도 같은 것들은, 아마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로비를 지나 바깥으로 나오니 여의도 저녁 바람이 불었다. 차갑지는 않았다. 한강 쪽에서 오는 바람이었다. 이민재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냥 걸었다.


본 글은 허구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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