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신약의 기도
가공의 제약사에서 희귀병 치료제 개발에 인생을 건 과학자와 그의 가족이 마주한 희망과 절망.
열두 번째 겨울이었다.
이준혁은 자정이 넘은 시각, 냉형광등 빛 아래서 분석 화면을 들여다봤다. 스물여덟 개의 환자 번호, 스물여덟 개의 그래프. 숫자들은 새벽 공기처럼 냉정했다.
그는 연구 노트의 첫 장을 폈다. 2014년 12월, 딸 서연이 여섯 살 생일을 사흘 앞두고 받아 든 진단서. ‘척수성 근위축증 1형.’ 소아과 전문의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대부분 두 살을 넘기지 못한다고. 서연이는 이미 기적이라고.
기적. 준혁은 그 단어를 믿지 않았다. 그는 메커니즘을 믿었다. SMN 단백질이 부족하면 운동 신경이 죽는다. 단백질 생산을 늘리면 신경이 살아날 수 있다. 거기서 나머지는 화학의 문제였다.
아내 민경이 연구소를 처음 방문한 건 그해 3월이었다.
“이 방에서 뭘 하는 거예요?”
서연이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온 길이었다. 민경의 눈은 충혈돼 있었고, 손에는 아직 입원 서류가 들려 있었다. 준혁은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분자 구조식, 실험 설계도, 임상 경로. 벽을 가득 채운 글씨들.
“고치려고.”
민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화이트보드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물었다.
“얼마나 걸려요?”
“모르겠어. 아마 오래.”
그것이 약속이자 선고였다.
임상 2상 결과가 나온 건 2021년 가을이었다. 준혁이 이끄는 소규모 바이오 연구팀은 투자자들 앞에 섰다. 희귀질환 치료제 임상 3상의 전 세계 평균 성공률은 58%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그 58%조차 환자 모집과 장기 추적이 전제된다는 것을 준혁은 덤덤하게 설명했다. 다들 숫자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이미 알았다.
그 무렵 서연이는 열세 살이었다. 전동 휠체어를 스스로 조종하며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의 연구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희망이 무거워질까봐. 기대가 독이 될까봐.
준혁도 그것을 알았다. 딸에게 단 한 번도 “아빠가 고쳐줄게”라고 말하지 않은 이유였다.
3상 중간 분석 결과는 지난주 금요일에 나왔다.
모니터링 위원회의 보고서는 열여섯 페이지였다. 첫 열다섯 장은 통계였다. 마지막 한 장이 문제였다. ‘현 시점 유효성 경계값 미도달. 계속 진행 여부 재검토 권고.’
준혁은 그 문장을 열 번쯤 읽었다. 미도달. 경계값. 재검토.
폐기가 아니었다. 중단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지도 않았다.
민경이 서재로 들어온 건 밤 11시였다.
“알고 있어요?”
“응.”
“어떻게 할 거예요?”
준혁은 모니터를 끄지 않은 채 돌아앉았다. 화면에는 스물여덟 개의 그래프가 여전히 켜져 있었다. 그 중 일곱 개의 곡선이 완만하게, 그러나 분명히 위를 향하고 있었다.
“계속 해야 해.”
민경은 잠시 침묵했다. 열두 해 동안 그 말을 들어온 침묵이었다. 처음에는 분노였고, 나중에는 체념이었으며, 지금은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한 형태라는 것을 아는 침묵이었다.
“서연이한테 말해줄 거예요?”
“아직은 아니야.”
“서연이가 물어봤어요. 오늘.”
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새벽 두 시, 그는 연구 노트를 닫으려다 멈췄다.
마지막 페이지에 무언가가 끼워져 있었다. 접힌 종이 한 장. 서연이의 글씨였다.
아빠,
나는 아빠가 무얼 만들려고 하는지 알아. 근데 그거 알아? 나한테는 이미 아빠가 오래전에 만들어준 게 있어. 아빠가 포기하지 않는 얼굴. 그게 내가 제일 오래 보고 싶은 거야.
잘 자요.
날짜는 그제 저녁이었다.
준혁은 종이를 손에 쥔 채 한참 앉아 있었다. 형광등이 미세하게 윙윙댔다. 바깥은 아직 어두웠다. 데이터는 여전히 화면 위에 있었고, 일곱 개의 곡선은 여전히 위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연구 노트를 다시 폈다.
새 페이지 상단에 날짜를 썼다. 그 아래, 첫 번째 문장을 눌러 썼다.
계속한다.
본 글은 정보 제공 목적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