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7 · Vol. III · No.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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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
GLOBAL

의약의 십자로

가공의 제약사 임상 책임자가 마지막 단계에서 불리한 데이터를 발견하고, 공시와 침묵 사이에서 선택한다. 실제 기업·티커는 등장하지 않는다.

· 2분 읽기 · #스토리#스릴러

윤소라는 3상 데이터베이스 잠금 화면 앞에서 열두 시간째 앉아 있었다. 화면에는 은성제약이 개발한 관절염 신약 ‘조인텍스’의 최종 통계 분석표가 떠 있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배웠다. 그런데 지금 이 숫자들은 뭔가를 감추고 있었다.

1차 유효성 지표는 위약군 대비 통증 개선율이 유의미하게 높았다. 회사가 3년간 기다려온 결과였다. 문제는 부속 표, 이상반응 항목이었다. 간독성 지표인 ALT 수치 상승 사례가 고용량군에서 위약군보다 세 배 가까이 많았다. 통계적으로는 아직 ‘유의하지 않다’는 각주가 달려 있었지만, 소라는 그 각주가 표본 수 부족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3상을 6개월만 더 돌렸다면 그 별표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소라 팀장님, 이사회 보고서 초안 언제쯤 받을 수 있을까요.” 임상개발본부장 한대영이 문을 살짝 열고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조바심이 묻어 있었다. 은성제약은 지난 2년간 파이프라인 실패가 이어지며 주가가 반토막 났고, 조인텍스는 회사가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카드였다.

“검토 중입니다. 오늘 밤까지 드리겠습니다.” 소라는 그렇게만 답했다.

문이 닫히자 그녀는 다시 화면을 들여다봤다. 2007년, 한 다국적 제약사가 당뇨병 치료제의 심혈관 위험 신호를 임상 후기까지 축소 보고했다가 뒤늦게 드러나 대규모 리콜과 소송으로 이어진 사건을 대학원 시절 사례 연구로 배운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남의 일이었다. 교과서 속 윤리 딜레마였다. 지금은 자신의 이름이 서명란에 들어갈 보고서였다.

선택지는 두 개였다. 하나, 이상반응을 통계적으로 정직하게 기술하되 ‘유의하지 않음’이라는 문구 뒤에 숨는다. 규정 위반은 아니다. 각주도 사실이다. 다만 읽는 사람이 위험의 크기를 체감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문장을 배열할 뿐이다. 둘, 원자료 그대로, 세 배라는 숫자와 표본이 작아 신뢰구간이 넓다는 한계를 동시에 명시해 식약처 제출본에 올린다. 승인이 늦어지거나, 최악의 경우 조건부 승인으로 방향이 틀어질 수도 있었다.

밤 열 시, 소라는 임상시험 코디네이터였던 시절 자신이 담당했던 68세 환자를 떠올렸다. 무릎 통증으로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그 환자에게 조인텍스는 삶의 질을 되찾아줄 약이었다. 동시에 그 환자의 간 수치가 흔들린다면, 그 사실을 모른 채 복용을 지속하다 되돌릴 수 없는 손상을 입을 수도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두 얼굴을 가진 숫자 앞에서, 자신이 지금 쓰는 문장 하나가 누군가의 몸속에서 실제로 벌어질 일이라는 걸 알았다. 동시에 이 보고서 한 줄이 은성제약 수천 명 직원의 고용과, 이미 손해를 보고 버텨온 개인투자자들의 계좌와도 이어져 있다는 것도 알았다. 어느 쪽도 추상이 아니었다.

새벽 두 시, 한대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결과 좋다는 소문이 이미 사업부에 돌고 있습니다. 내일 보고 부탁드려요.” 소라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결과가 좋다는 소문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그녀 말고 이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셋뿐이었다.

그녀는 문서 파일을 열고 커서를 이상반응 섹션 위에 올려두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잠시 멈췄다. 지우는 것도, 강조하는 것도 아직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자신이 어떤 문장을 쓰든 그것이 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소라는 저장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로, 커서만 깜빡이는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본 글은 허구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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