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7 · Vol. III · No. 44
Financial banking stock exchange
Openverse (CC0)
스릴러
GLOBAL

대형 청구서의 뒷면

재보험 심사역이 일반적이지 않은 대형 손해 청구를 조사하다 예상 밖의 진실을 마주친다.

· 3분 읽기 · #스토리#스릴러

파일 두께가 손가락 세 마디를 넘었다. 나는 자를 꺼내 재어보지는 않았지만, 십 년 경력에서 쌓인 감각이 말해줬다. 이 두께는 보통이 아니다.

서울 강남구 어딘가의 동방재보험 본사, 오후 네 시 사십분. 창밖으로 빗줄기가 유리를 타고 내렸다. 팀장 오 부장이 내 책상에 파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말레이시아 포트클랑 창고 화재. 청구액 820억. 삼광화재에서 올라온 거야. 당신이 보고 싶다 했지.”

내가 그 청구 건을 보고 싶다고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파일을 펼쳤다.

우성글로벌물류가 보유한 항구 인근 냉동 창고였다. 3월 초, 새벽 두 시에 화재가 시작되어 창고 세 동이 전소했다. 피보험 목적물은 반도체 부품과 정밀화학 원자재. 감정서에는 소실 재고가 총 820억 원으로 평가돼 있었다.

나는 먼저 보험 가입 이력을 뽑았다. 재보험 심사역이라면 가장 먼저 보는 게 그것이다. 청구 직전 보험 한도 변경 여부. 이건 규칙이 아니라 본능에 가깝다.

스위스의 한 재보험 연구기관이 2019년에 발표한 분석에 따르면, 재보험 사기로 판명된 대형 청구 건 중 60% 이상에서 손해 발생 이전 여섯 달 안에 보험 한도가 유의미하게 상향됐다. 내가 처음 이 일을 배울 때 선배가 손때 묻은 출력본을 건네며 했던 말이 있다. “이게 전부는 아니야. 하지만 이게 없는 경우도 드물어.”

우성글로벌물류의 보험 이력을 보니 직전 계약 갱신일이 12월 31일이었다. 화재는 3월 5일. 갱신 후 두 달 조금 넘어서 화재가 났다. 한도는 갱신 전 550억에서 900억으로 올랐다. 63.6% 상향.

나는 잠시 멈췄다.

한도 상향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사업이 성장하면 한도도 는다. 하지만 나는 감정서에 첨부된 재고 실사 보고서를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보고서의 재고 기준 시점은 전년도 12월 15일이었다. 갱신 계약서에는 이 실사 보고서를 근거로 한도를 산정했다고 적혀 있었다. 820억 원이 소실됐다는 재고는 그 열두 장짜리 보고서 위에 세워진 숫자였다.

그런데 보고서 말미에 서명 날짜가 있었다. 12월 28일.

실사 날짜는 12월 15일, 서명은 12월 28일, 보험 갱신은 12월 31일.

이건 너무 빠듯하다. 열다섯 일 만에 현장 실사부터 내부 결재, 보험사 심사, 계약 체결까지 끝낸 것이다. 삼광화재의 담당자는 누구일까.

계약서에 적힌 담당자 이름을 보니 ‘박재현’이었다. 나는 사내 시스템에서 그 이름을 검색했다. 삼광화재 기업보험팀. 가입 이력 세 건. 모두 최근 이 년 사이에 체결된 것들이었다.

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나는 받았다.

“이진수 심사역이시죠. 동방재보험에 계신.” 낮고 차분한 남자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만.”

“우성글로벌물류 건 보시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거 조심하셔야 해요. 진짜로.”

“누구십니까?”

전화는 끊겼다.

나는 파일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 빗속에 차들이 지나다녔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오후였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파일을 다시 펼쳤다.

재고 실사 보고서를 작성한 회사의 이름이 있었다. ‘케이로직 감정서비스’. 사업자번호를 공정거래위원회 포털에서 조회했다. 설립일은 그해 2월이었다. 화재가 일어나기 꼭 열세 달 전.

나는 서랍에서 노트를 꺼냈다. 볼펜으로 날짜와 이름들을 받아 적었다. 전산에 남기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나 자신도 정확히 몰랐다.

오 부장이 퇴근 준비를 하며 지나쳤다.

“어때? 평범한 거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오 부장이 가고 나서 나는 파일 맨 뒤쪽을 뒤졌다. 현장 사진들. 화재 진압 후 찍은 것들이었다. 검게 탄 선반, 녹아내린 지붕 철골, 잔해가 된 팔레트들. 그런데 세 번째 사진에서 손이 멈췄다. 배경 왼쪽 끝에 소화기가 선명하게 보였다. 벽에 걸린 소화기가 아니었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뚜껑이 닫힌 채로.

새벽 두 시에 발화한 창고. 무인이었을 것이다. 화재가 너무 빠르게 번졌을 수도 있다. 설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사진 한 장이 나를 붙잡았다.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한 무언가의 윤곽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느낌. 이 느낌을 나는 안다. 몇 번 겪어봤다.

나는 파일을 잠금 서랍에 넣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 아침 가장 먼저 할 일이 생겼다. 케이로직 감정서비스의 대표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것이 박재현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건물 밖으로 나오니 비가 그쳐 있었다. 젖은 아스팔트에 가로등 빛이 번졌다. 나는 택시를 잡으면서 820이라는 숫자를 다시 떠올렸다. 억 단위의 숫자는 늘 무겁다. 하지만 그 무게가 어디서 오는지, 실제 소실에서 오는 것인지 다른 데서 오는 것인지, 그건 숫자만 봐서는 알 수 없다. 뒷면을 봐야 한다.

파일의 뒷면, 청구서의 뒷면, 그리고 어쩌면 이 사건 전체의 뒷면.

나는 아직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본 글은 정보 제공 목적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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