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옷의 두 번째 인생
패션 회사의 지속가능성 담당자가 폐의류 재활용 시스템 구축을 주도하며, 기업의 진정성과 책임감을 찾아간다.
옷장을 열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춘다.
언제부터인가 입지 않는 옷들이 공간의 절반을 차지하게 됐다. 꼬리표를 뜯지 않은 블라우스 하나, 두 번도 신지 않은 운동화,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구석으로 밀려난 청바지.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에코루프에서 내 일이 무엇인지 다시 떠올린다.
나는 에코루프의 지속가능성팀장 강서현이다. 패션 회사에서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은 종종 마케팅 언어처럼 들린다. 실제로도 그런 경우가 많다. 입사 첫 해, 나는 그 사실을 느리게, 그리고 아프게 배웠다.
그해 가을 우리 팀은 폐의류 회수 시스템 파일럿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매장 어귀에 수거함을 두고, 소비자가 더 이상 입지 않는 옷을 가져오면 재활용 처리업체로 넘기는 구조였다. 기획서는 두툼했다. 전 세계에서 매년 9,200만 톤의 섬유 폐기물이 발생하고, 그 중 상당수가 매립지에 묻힌다는 데이터도 넣었다. 숫자는 선명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마케팅팀 부장은 회의실에서 기획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게 팔리는 이야기인지 생각해봐요. 소비자는 새 옷을 사러 매장에 오지, 헌 옷을 버리러 오지 않아요.”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프로그램은 보류됐다. 나는 책상으로 돌아와 기획서를 덮었다. 밖에서는 이 계절 신상품 촬영이 한창이었다. 모델이 입고 나온 코트는 다음 시즌에 절반 가격으로, 그 다음 시즌에는 재고로 전락할 것이었다. 우리가 만드는 옷이 소비자 손을 거치기도 전에 이미 어딘가로 사라질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겨울 내내 다른 방법을 찾았다.
작은 실험이었다. 강남구 소재 세 개 매장에만 수거함을 놓았다. 홍보도 하지 않았다. 단순히 ‘당신의 옷은 여기서 다시 살 수 있습니다’라고 쓴 안내문 하나만 붙였다. 첫 주에 수거된 옷은 73벌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두 번째 주에는 130벌. 석 달 뒤, 세 매장 합계로 4,200벌이 걷혔다.
숫자보다 편지가 기억에 남는다.
수거함 옆에 방명록을 하나 놔뒀는데, 한 할머니가 글씨를 꾹꾹 눌러 써놓았다. “손녀 돌잔치 때 입힌 드레스예요. 버리기 아까워 20년 보관했는데, 이제 다른 아이에게 예쁘게 입혀지면 좋겠어요.” 그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오래 앉아 있었다.
옷에는 기억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쓰레기로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을 연장하는 것인지. 어쩌면 그게 이 일의 진짜 의미인지도 몰랐다.
파일럿 결과를 들고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을 때 분위기는 달랐다. 마케팅팀 부장이 먼저 물었다. “재활용 처리 비용은 어떻게 됩니까?” 숫자를 말했더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비자 유입 효과는요?” 다시 숫자를 댔다. 같은 기간 수거함을 설치한 매장의 신규 방문객이 11% 증가했다는 데이터였다. 완벽한 인과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시하기도 어려운 숫자였다.
그렇게 시스템은 전국 매장으로 확대됐다.
과정이 늘 매끄럽지는 않았다. 재활용 처리업체와의 계약 협상은 세 번 깨졌고, 수거된 옷의 40%는 품질이 너무 낮아 재활용 자체가 불가능했다. 우리가 그 옷을 대신 떠안아야 했다. 일부 언론은 ‘에코워싱’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우리 프로그램을 비판했다. 진심인지, 홍보인지, 어느 쪽이냐는 질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나도 몰랐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것이 진짜인가, 아니면 우리가 만드는 포장지인가. 숫자가 좋아도 그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이 진짜 문제가 시작되는 때일 것이다.
올봄, 재활용 처리된 옷감으로 만든 첫 리사이클 라인이 나왔다. 소비자 반응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팔렸다. 어떤 이들은 재활용 원단이라는 사실을 신기하게 여겼고, 어떤 이들은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뭔가 굉장한 것을 바라는 마음이 줄었다.
어제 옷장을 다시 열었다. 꼬리표를 뜯지 않은 블라우스가 아직 거기 있었다. 손을 뻗어 꼬리표를 잘랐다. 무겁지 않았다. 내일 입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뒤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입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모른다는 것을 아는 채로 일을 계속하는 것이 무언가를 바꾼다고는 믿는다. 확신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느낀다.
본 글은 정보 제공 목적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