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 전쟁: 신흥 강자의 도전기
신생 반도체 기업이 기존 강자들의 독점 시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극한의 기술 경쟁에 뛰어든다. 번번이 밀려나던 도전자가 마침내 발견한 차별화 전략은?
설계도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 있다.
전류가 처음 흘렀을 때, 새빛반도체의 시험 보드 위에서 논리 게이트 하나가 깜빡였다. 공학팀장 이은하는 모니터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숨을 참았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굳어 있었다. 스물네 개월간의 설계. 세 번의 테이프아웃. 두 번의 실패. 이번이 마지막 시도였다.
“부팅 완료.”
누군가의 목소리가 실험실 공기를 갈랐다. 이은하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화면 속 그래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에이반-1. 새빛반도체가 만든 첫 번째 칩이 깨어났다.
새빛반도체는 직원이 스물두 명인 회사였다. 강남 외곽 오피스텔 두 층을 쓰고 있었고, 냉장고 안에는 항상 에너지 음료가 가득했다. 투자자들은 회의적이었다. 시드 라운드 미팅에서 한 심사역은 자료를 읽지도 않고 말했다. “그란다시스템즈가 이미 다 먹은 밥상입니다. 거기에 숟가락을 얹으러 가시겠다는 거죠?”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란다시스템즈는 글로벌 AI 가속기 시장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직전 회계연도 기준, 데이터센터 부문 매출만 470억 달러를 넘었다. 반도체 업계 역사상 단일 제품군이 이렇게 빠르게 성장한 사례는 없었다. 경쟁자라고 할 만한 곳이 있기는 했지만, 그란다의 그늘 아래서 버티는 수준이었다.
이은하는 그 숫자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보드 앞에 앉아 팀원들에게 말했던 건 그 숫자가 아니었다.
“그란다는 학습 칩을 만든다. 우리는 추론 칩을 만들 거야.”
처음에는 아무도 그 차이를 크게 여기지 않았다. AI 학습과 AI 추론은 같은 연산의 두 단계처럼 보였다. 그러나 2024년 하반기, 업계 분석 보고서 하나가 돌았다. AI 추론 수요가 처음으로 학습 수요를 추월했다는 내용이었다. 수조 원을 들여 거대 모델을 훈련시킨 기업들이 이제는 그 모델을 실제 서비스에 올려 ‘돌리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문제의 성격이 달라졌다. 필요한 전력이 달라졌다. 요구하는 지연 시간이 달라졌다.
에이반-1은 그 간극을 위해 설계되었다.
간극이 시장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모리텍이 새빛반도체에 연락을 해온 건 에이반-1이 첫 부팅에 성공하고 석 달이 지난 뒤였다. 물류 자동화 소프트웨어 기업인 모리텍은 현장 서버에 AI 추론 엔진을 올리려 했다. 냉각 설비가 없는 지방 물류센터들. 거기에 그란다의 칩을 넣으면 전력 소비가 버텨주지 않았다.
모리텍 기술팀이 벤치마크 요청서를 보냈다. 새빛반도체는 닷새를 꼬박 태웠다.
결과는 당황스러웠다. 순수 연산 속도에서 에이반-1은 그란다의 최신 칩에 밀렸다. 23퍼센트 느렸다. 모리텍에서 답신이 왔다. “저희 기준은 초당 토큰 처리량입니다. 현재 수치로는 계약 진행이 어렵습니다.”
이은하는 그날 저녁 회의실에 혼자 남았다. 23퍼센트. 숫자가 등 뒤에 달라붙은 것처럼 느껴졌다. 팀원들이 하나둘 퇴근했다. 불을 끄지 않은 채 이은하는 테스트 로그를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초당 토큰만 보던 시선이 자정 무렵 다른 숫자로 흘러갔다.
와트당 토큰 처리량. 전력 효율 지표. 에이반-1은 그란다 칩보다 23퍼센트 느렸지만, 동일한 전력 소비 기준으로 환산하면 41퍼센트 앞서 있었다. 같은 배터리를 꽂아두면 에이반-1이 더 오래, 더 많이 처리했다.
이은하는 창밖의 불빛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란다가 쌓아 올린 기준이 있었다. 그 기준 위에서 경쟁하면 질 것이 뻔했다. 그러나 기준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튿날 아침, 이은하는 모리텍에 다시 연락했다.
“벤치마크 항목을 바꿔서 다시 제출하고 싶습니다. 초당 토큰이 아니라 와트당 토큰으로요. 그쪽 현장 조건에 더 맞는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모리텍 기술팀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짧게 답했다. “보내주세요.”
새빛반도체가 재제출한 자료는 다른 언어로 쓰인 것 같았다. 냉각 설비 없이 운영되는 현장 서버의 실제 운영비. 여름철 현장 온도 기준 과열 빈도 비교. 연간 전력 비용 차이. 모리텍 구매팀은 일주일 후 계약서를 보내왔다.
에이반-1은 그렇게 처음으로 현장에 나갔다. 어느 지방 물류센터의 서버 랙 안, 그란다 칩이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공간. 팬 없이, 낮은 열기로, 조용하게.
이은하는 그날 오후 팀 채팅에 짧게 썼다. “첫 번째 고객.” 그것뿐이었다.
에이반-1이 어디로 가게 될지, 그 뒤로 어떤 공간을 찾아가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은하도, 팀원들도. 다만 확인된 것이 하나 있었다. 남이 세운 기준 위에서 싸울 필요는 없다는 것.
판은 하나가 아니었다.
본 글은 허구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