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7 · Vol. III · No. 37
Mining equip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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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
GLOBAL

칩 설계자의 유산

50년 반도체 엔지니어가 자신의 특허가 무단으로 도용되는 것을 발견한다. 혁신의 시대, 지적재산권은 무너지고 과거의 신뢰는 사라진다.

· 3분 읽기 · #스토리#멜로

정 박사의 손가락은 더 이상 예전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실리콘 웨이퍼 위의 미세한 선들을 그려내던 손이 이제는 종이컵을 감싸쥐고 커피가 식어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연구실 불빛은 여전히 하얗게 남아 있었지만, 그 빛 아래 앉은 사람은 달랐다.

1974년, 그가 처음 칩 설계에 손을 댔을 때 논리 게이트 하나를 그리는 데 며칠이 걸렸다. 잉크 선반 위에 제도 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실수를 지우는 수정액 냄새가 연구실에 가득했다. 그 시절 반도체 회사들은 모두 같은 언어를 썼다. 집적도는 낮았고, 신뢰는 높았다.

지금은 다 달랐다.

“박사님, 회의 시작합니다.”

비서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흘러들었다. 정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릎이 시큼거렸다. 그것도 낯선 감각이었다. 몸이 나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화상 회의 창이 열리자 베이징과 선전의 얼굴들이 격자무늬로 나타났다. 중국 파트너사 리홍젠 대표는 그날따라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공식적인 자리라는 뜻이었다.

“정 박사님의 특허 EP2847631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 박사의 귀가 예민해졌다. EP2847631. 2009년에 등록한 저전력 캐시 컨트롤러 아키텍처였다. 모바일 프로세서가 배터리를 삼킬 듯 소모하던 시절, 그가 18개월을 밤새워 완성한 설계였다.

“우리 쪽 엔지니어들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IP와 유사한 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물론 우리 회사는 그걸 전혀 몰랐고…”

정 박사는 화면 속 리 대표의 눈을 바라봤다. 유사. 그 단어는 참 능란하게 쓰이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그는 특허 검색 데이터베이스를 열었다. 중국 국가지식재산권국, CNIPA. 검색어를 입력하자 결과가 쏟아졌다. 선전에 본사를 둔 팹리스 회사 세 곳이 그의 캐시 컨트롤러 아키텍처와 구조적으로 동일한 회로를 기반으로 한 SoC를 생산하고 있었다. SMIC(중신국제)의 28나노미터 공정을 사용한 제품들이었다. 양산 원가는 그가 설계하던 시절의 5분의 1.

서류들을 인쇄해 쌓아두자 무게가 손바닥을 짓눌렀다.

정 박사의 딸 지은은 그날 저녁 아버지 사무실로 찾아왔다. 지은은 특허법을 전공한 변호사였다. 아버지가 이 일을 의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소송해야 해요, 아버지. 증거가 있잖아요.”

“증거가 있어도 집행이 안 돼.”

정 박사는 낡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창밖에는 판교 테크노밸리의 밤이 깔려 있었다. 불빛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저 빛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누군가의 밤잠을 담보로 켜진 것인지.

“2000년대 초반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 내가 DRAM 컨트롤러 설계를 막 마쳤을 때. 그때는 복사가 느렸어. 리버스 엔지니어링하는 데 5년, 양산하는 데 또 3년. 그 사이에 우리는 이미 다음 세대로 넘어가 있었지.”

지은은 아버지의 말을 잘랐다.

“지금은 달라요. 클라우드 기반 EDA 툴, 공개된 학술 논문, RISC-V 같은 오픈 아키텍처. 복사 사이클이 18개월로 줄었어요. 아버지 특허 수명이 20년인데 절반이 이미 지났고.”

정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딸의 말이 맞았다. 설계 자동화 툴의 발전은 혁신의 속도를 올리는 동시에 모방의 속도도 올렸다. 그가 처음 VLSI 설계를 배울 때 사용하던 SPICE 시뮬레이터는 이제 수백 배 강력해졌고, 그 강력함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다. 신뢰할 수 없는 누구에게도.

다음 날 아침 그는 수원에 있는 팹으로 차를 몰았다. 50년 전 그가 처음 클린룸에 발을 디뎠던 곳은 아니었지만, 반도체를 처음 배운 교수의 연구실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지금 이 팹은 5나노미터 공정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가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 10마이크로미터였던 선폭이 2000분의 1로 줄어드는 동안, 그도 늙어 있었다.

클린룸 유리창 너머로 웨이퍼 핸들러가 조용히 움직였다. 기계는 지치지 않았다. 정 박사는 유리에 이마를 가볍게 기댔다. 차가웠다.

그는 이 공정 하나하나에 자신의 특허가 녹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열 처리 시퀀스에, 포토레지스트 패턴에, 층간 절연막 두께 알고리즘에. 자신이 발명한 것들이 지구 반대편 팹에서도 동시에 돌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 익숙했다.

법정 싸움은 시작될 것이었다. 지은이 그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 박사가 그날 팹 앞에서 오래 머문 것은 분노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남긴 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세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허락받지 않은 방식으로.

그리고 그것이 그를 더 아프게 했다.

특허청 민원실에서 받은 서류 봉투는 두꺼웠다. 절차는 시작될 것이었다. 국제 특허 분쟁 중재 절차, ITC 제소, 협상 테이블. 지은은 자신 있어 보였다. 정 박사는 딸의 손을 잡았다.

“이길 수도 있어.”

“네.”

“그래도 그 설계는 이미 백만 개 단말기 위에서 돌아가고 있을 거야.”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봄이었다. 판교 연구소 앞 벚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지고 있었다. 꽃잎이 아스팔트 위에 눌려 갈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정 박사는 잠시 내려다봤다. 혁신이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활짝 피어 세상에 내주고 나면,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는 더 이상 꽃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는.

그는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새 설계 도면이 놓여 있었다. 2나노미터 공정 대응 캐시 아키텍처. 마지막 프로젝트라고 생각했지만, 손가락은 이미 펜을 집고 있었다.

본 글은 허구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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