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08 · Vol. III · No. 28
Electronic semiconductor chips on manufacturing sur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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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
GLOBAL

반도체 부족 사태

2021년 반도체 부족 위기, 공급망 관리자의 생존 투쟁

· 5분 읽기 · #스토리#스릴러

칩의 갈증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목마름이 있다. 하나는 물이 없어서 생기는 목마름이고, 다른 하나는 누군가가 물을 숨겨두어서 생기는 목마름이다. 윤서진은 2021년 가을, 후자가 훨씬 더 잔인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배웠다.

그녀는 한테크의 공급망 관리부장이었다. 혹은, 지금 그 역할을 맡은 조직 그 자체였다. 공급망이란 본래 혈관과 같다. 아무도 평소에 혈관을 의식하지 않는다. 피가 잘 돌면 심장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러나 혈관이 막히는 순간, 온몸이 그 존재를 동시에 깨닫는다.

그날 아침, 서진의 책상 위 모니터는 경고 메시지로 가득했다.


“공급사 측에서 할당량을 다시 조정했습니다.”

팀원 민준이 보고서를 내밀며 말했다. 서진은 숫자를 훑었다. 3분기 계획 물량의 47퍼센트. 절반도 안 되는 수치였다. 그것도 대만 팹리스 파트너사인 동방반도체(DONBAND)에서 넘어온 통보였다. 통보라는 단어조차 과분했다. 이메일 한 줄이었다.

“이유가 있대요?”

“수요 급증과 공정 병목이라고만 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없었어요.”

서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2021년, 세계는 코로나 이후 수요 폭발 속에서 반도체 부족이라는 새로운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다. 자동차 제조사들이 칩 한 장 없어 수십만 대의 차량 생산을 멈췄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은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려도 살 수 없었다. 그 혼란의 한복판에서, 한테크의 핵심 마이크로컨트롤러 MCU-7 시리즈의 재고는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테크는 소비자 가전 스타트업이었다. 상장된 지 3년, 티커 HTK은 나스닥에서 꾸준히 성장하는 중형주였다. 규모는 작았지만 독자적 MCU 설계로 가전 IoT 시장에서 틈새를 파고들었고, 내년 신제품 출시가 회사의 도약 계획 전체를 떠받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신제품에 MCU-7이 핵심 부품이라는 사실이었다.


공급 위기가 시작된 것은 6주 전이었다.

처음에는 업계 전반의 문제처럼 보였다. 칸테크 외에도 다른 팹리스 파트너들이 줄줄이 할당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공급망 포럼에는 불안한 메시지들이 넘쳐났고, 서진의 스마트폰에는 경쟁사 구매 담당자들의 안부 전화가 이어졌다. 모두가 같은 상황이라는 위안을 나누면서도, 실은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3주 전부터 이상한 신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업계 2위 회사인 신경테크(SINGYEONG)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서진이 처음 그 소문을 들은 것은 오래된 거래처 사장과의 저녁 자리에서였다. 칸테크 측 영업 담당자가 귀띔해준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이었다.

“크레스텍이 MCU-7 계열 재고를 대량으로 매입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3배 이상 웃돈까지 얹어서.”

서진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언제부터요?”

“3개월 전부터요. 공급 위기가 본격화되기 전부터 이미 움직인 거죠.”

그 말의 무게는 다음 날 아침에야 온전히 내려앉았다. 3개월 전이라면 공급 병목이 외부에 알려지기 훨씬 전이었다. 크레스텍은 위기를 예측했거나, 아니면 위기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서진은 혼자 회의실에 앉아 칸테크의 공급 데이터를 다시 훑었다. 숫자들은 거짓말하지 않는 법이었다. 한테크에 대한 할당량 삭감 폭이 업계 평균보다 두 배 이상 컸다. 반면 크레스텍의 기존 계약 물량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크레스텍과 칸테크 사이에 장기 독점 공급 협약 논의가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림이 눈에 보였다.

크레스텍은 부족한 칩을 비축해 두고 있었다. 한테크 같은 중소 경쟁사들은 자연스럽게 재고를 잃는다. 신제품 출시가 지연되고, 투자자들은 신뢰를 잃고, 주가가 흔들린다. 크레스텍은 그 혼란이 정점에 달했을 때, 넉넉한 칩 재고를 바탕으로 시장을 독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에서 이것이 불법인지 아닌지는 법률팀의 문제였다. 지금 당장 서진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달랐다. 한테크 공급망 관리부 전체가 이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신제품 출시 일정은 14주 남아 있었다.


서진은 파트너사 목록을 처음부터 다시 꺼냈다.

칸테크 외에 MCU-7 계열을 생산할 수 있는 팹리스는 세계에 몇 곳 없었다. 그 중 두 곳은 이미 크레스텍과 장기 계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한 곳은 일본 소재 나가노 세미컨덕터였다. 한테크는 나가노와 거래한 적이 없었다. 규모가 작고, 납기가 불안정하다는 평판 때문에 애초에 후보에서 제외됐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기준이 필요했다.

서진은 이틀 동안 잠을 줄이고 나가노의 공개 데이터를 분석했다. 최근 2년간의 납기 이력, 품질 보증 문서, 기술 명세서. 나가노의 공정은 구세대 기술이었지만, MCU-7과 핀 호환되는 대체 칩 설계가 있었다. 성능 차이는 약 8퍼센트. 소비 전력이 다소 높았다.

“이 8퍼센트가 문제예요.” 기술팀 이사 채린이 회의 자리에서 말했다. “신제품 배터리 수명 보증이 18시간인데, 이 칩 쓰면 16시간 조금 넘을 것 같아요.”

“마케팅에서 14시간으로 낮추면?”

“그건 제품 기획 전체를 바꾸는 일이에요.”

“전체를 바꾸는 것과 출시 자체가 없어지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 생각해봐.”

채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서진은 나가노의 영업 담당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오카모토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일본어 통역 없이 영어로 밀어붙였다.

“재고 보유량이 얼마인가요.”

“지금 당장은 제한적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장기 계약을 논의할 용의가 있어요. 지금 당장.”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진은 그 침묵을 메우지 않았다. 협상에서 침묵을 먼저 깨는 쪽이 약자였다.

“조건을 들어볼게요.”


나가노와의 협상은 나흘 동안 이어졌다.

오카모토는 처음에 프리미엄 가격을 요구했다. 칩 단가를 기존 대비 35퍼센트 올린 견적서를 보내왔다. 서진은 맞불을 놓았다. 2년 장기 계약 물량을 선약속하는 대신 단가를 12퍼센트 인상 선에서 합의하자고 제안했다. 회계팀의 반발이 예상됐지만, 서진은 지금이 비용 최소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공급 안정 문제였다.

협상이 마무리되던 날 밤, 서진은 혼자 회의실에 남아 계약 문서를 검토했다. 복도 너머로 동료들이 퇴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불을 껐다. 모니터 빛만이 서진의 얼굴을 비췄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했다. 회사의 혈관이 막혔을 때, 공급망 관리부가 하는 일은 새로운 경로를 찾는 것이었다. 혈관을 우회하는 새 루트. 서진의 팀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때 시스템을 유지하는 일.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고, 위기 때만 비로소 존재를 증명하는 일.

크레스텍의 전략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것은 나중에 판명될 문제였다. 지금 이 순간 서진이 맡은 역할은 단 하나였다. 한테크가 내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오늘 밤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

사인을 마치고 이메일을 전송했다.

보낸 편지함에 새 메일이 하나 생겼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14주 후, 신제품은 예정대로 출시됐다.

배터리 수명은 16.5시간으로 표기됐다. 마케팅팀은 처음엔 저항했지만, 결국 새로운 슬로건을 만들었다. “하루를 버티는 힘.” 시장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18시간이라는 숫자보다, 16.5시간이라는 정직한 숫자가 더 신뢰를 얻었는지도 몰랐다.

크레스텍은 그해 4분기 실적 발표에서 시장 점유율 확대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칩 비축 전략으로 경쟁사들을 압박하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다만 한테크는 그 명단에 없었다.

HTK 주가는 신제품 출시 당일 6.3퍼센트 올랐다. 서진은 뉴스 알림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뒤집어 화면이 보이지 않게 놓았다. 주가가 오르든 내리든, 그것은 결과였다. 공급망은 결과를 만드는 구조가 아니라, 결과가 가능하도록 흐름을 유지하는 구조였다.

민준이 커피 두 잔을 들고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수고 많으셨어요.”

서진은 커피를 받아들며 말했다.

“반도체 부족은 아직 안 끝났어.”

“알아요.”

“그럼 됐어.”

창밖으로 늦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혈관은 다시 흐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당연한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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