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의 외로운 경주
반도체 소재 공급업체의 경영진이 급격한 수요 증가에 직면하고, 가격 인상이라는 도덕적 선택 앞에서 갈등한다.
새벽 두 시, 정재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침실 천장이 파랗게 물들었다. 화면을 확인하기도 전에 발신자를 알았다. 이 시각에 전화하는 사람은 세상에 한 명뿐이었다.
“이사님.” 박민수 영업팀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더가 들어왔습니다. 어마어마합니다.”
정재혁은 몸을 일으켰다. 아내가 뒤척였지만 깨지는 않았다.
“얼마?”
“육 개월치입니다. 한꺼번에요.”
숫자를 들었을 때, 정재혁은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광진소재가 반년을 통째로 팔아야 버는 돈이었다. 그것을 한 거래처가 선불로 내겠다고 했다. 조건은 하나였다. 납품 단가를 현재의 세 배로 올릴 것.
광진소재는 경기도 안성에 본사를 둔 반도체 특수소재 업체였다. 직원 이백사십 명. 창업한 지 열두 해. 주력 제품은 식각 공정용 불화 화합물과 초고순도 세정액이었다. 이름이 알려진 회사는 아니었다. 완성된 칩이 스마트폰에 들어가거나 자동차 전장부품으로 출하되고 나서도, 그 안에 광진소재의 소재가 녹아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공급망 담당자 몇 명뿐이었다.
그것이 정재혁이 열두 해 동안 자랑스러워한 부분이었다. 없으면 안 되는 존재. 주목받지 않아도 기어가 맞물리는 것처럼 제자리에 있는 존재.
그 자리가 이제 갑자기 너무 좁아졌다.
문제는 이 년 전부터 조짐이 있었다.
동유럽에서 전쟁이 터지자 반도체용 특수가스 시장이 뒤집혔다. 그 지역은 반도체 노광 공정에 쓰이는 네온가스의 주요 생산지였다. 전 세계 공급량의 상당 부분이 하룻밤 새 불확실해졌다. 네온가스 현물 가격은 수개월 안에 다섯 배를 넘겼다. 일부 보고서는 여섯 배라고 했다. 정재혁은 그 숫자를 뉴스에서 보면서도 실감하지 못했다. 광진소재는 가스업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쇄 반응은 멈추지 않았다.
가스업체들이 가격을 올리자 소재업체들도 올렸다. 소재업체들이 올리자 광진소재의 원가도 올라갔다. 그사이 자동차와 가전기기 메이커들은 재고를 쌓기 시작했다. 파운드리 업체들은 주문 가시성을 넓혀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주문이 밀리고, 밀린 주문이 취소되고, 취소된 자리에 더 큰 주문이 들어오는 혼돈이 이 년째 계속됐다.
정재혁은 그 혼돈 속에서 단가를 올리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오래된 거래처들 때문이었다.
대운반도체는 광진소재의 첫 번째 고객이었다.
창업 초기, 정재혁이 납품 단가를 낮춰달라는 요청을 거부하지 못했던 그 시절부터 함께한 거래처였다. 대운반도체의 공정 엔지니어들과 함께 밤을 새워 불량률을 잡았다. 그들의 구매팀장이 먼저 전화해서 연말 보너스를 챙겨주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대운반도체는 광진소재 전체 매출의 사십 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리고 지금 밤새 전화한 새 고객, 에이스팹은 미국계 팹리스의 위탁 생산 파트너였다. 아시아에 거점을 두고 급성장 중이었다. 에이스팹이 요구한 조건은 분명했다. 세 배 단가, 전량 독점 공급.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다른 고객에게 쪼갤 물량은 없었다.
박민수는 계속 말했다.
“이사님, 이걸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원가는 지난 이 년 동안 삼십 퍼센트 올랐어요. 저희 마진은 반 토막 났고요. 이 기회를 안 잡으면 내년 설비 투자 예산이 없습니다.”
정재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민수가 잠시 침묵하다가 덧붙였다. “대운반도체가 어렵다는 거 압니다. 그런데 그쪽도 공급처를 다변화하겠다고 한 지 오래됐잖아요. 저희만 기다려줄 이유가 없어요. 이사님이 기다려줄 이유도 없고요.”
다음 날 오전, 정재혁은 혼자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두 장의 서류가 놓여 있었다. 에이스팹의 계약 초안과, 대운반도체와의 기존 연간 공급 약정서였다. 약정서에는 단가 조정 조항이 있었다. 법적 구속력은 없었다. 그냥 신뢰의 서류였다.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공장 마당에 화물 트럭이 두 대 들어오고 있었다. 오전 출하분이었다. 저 트럭에 실린 소재가 어디로 가는지, 최종적으로 어떤 제품 안에 들어가는지를 정재혁은 대략 알았다. 병원의 CT 기기, 가정용 냉장고, 어딘가의 데이터센터. 이름 없이 어딘가에 있는 것들.
이사회는 이미 에이스팹 계약을 지지했다. 재무이사는 말했다. “이건 기회가 아니라 생존입니다.” 생산이사는 말했다. “설비가 낡고 있어요. 올해 안에 투자 못 하면 내년엔 품질 보증을 못 합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정재혁은 대운반도체의 구매팀장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창업 초기 겨울, 자기 회사 예산에서 광진소재 연구비를 지원해줬던 그 사람. 지금은 이미 다른 회사로 옮겼지만, 그 시절 맺어진 관계는 계약서 위에 조용히 살아 있었다.
단가를 세 배 올리면 대운반도체는 살아남지 못한다.
정재혁은 그것을 알았다. 에이스팹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은 대운반도체의 공정 라인에 손수 빗장을 걸어 잠그는 일이었다.
그러나 에이스팹을 거절하면?
내년 투자 예산이 없다. 품질이 흔들린다. 그러면 광진소재 자신이 쓰러진다. 직원 이백사십 명의 생계가 걸려 있었다. 공장 마당에 지금 들어서는 저 트럭 운전기사도 광진소재에 기댄 물류업체 소속이었다.
오후 세 시, 박민수가 문을 두드렸다.
“에이스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내일 오전까지 회신을 달라고 합니다.”
정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민수가 나가려다 멈췄다.
“이사님,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하세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숫자만 보면 답이 분명한데, 자꾸 다른 생각이 납니다. 저도 을(乙)로 시작했거든요. 광진소재 입사 전에 작은 부품사 다녔을 때. 거기서 갑이 단가 후려치는 거 맞으면서 버텼는데…” 그는 말을 잘랐다. “그게 지금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서요.”
정재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박민수가 나가고, 회의실에는 다시 고요가 들어찼다.
저녁 여섯 시. 직원들이 퇴근하고 공장 마당이 조용해졌다.
정재혁은 탁자 위의 서류 두 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에이스팹의 계약 초안과, 대운반도체와의 약정서. 둘 다 손에 들지 않은 채로.
어느 쪽을 선택해도 그는 무언가를 끊어야 했다. 그것이 계약인지, 신뢰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오래된 어떤 믿음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는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스크롤이 멈춘 곳이 어딘지는, 이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은 알 수 없다.
본 글은 정보 제공 목적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