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7 · Vol. III · No. 37
스릴러
GLOBAL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계좌

금융 사기 조사관이 유령 계좌를 통해 빠져나가는 수백만 달러를 추적하면서 윤리와 기업의 생존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 3분 읽기 · #스토리#스릴러

박수진은 모니터 세 개를 동시에 바라보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새벽 2시 37분. 마주페이 본사 17층 사기 조사팀 사무실엔 그녀 혼자였다.

“여기서 또 튀어나왔네.”

트랜잭션 로그 화면에 붉은 점이 하나 깜빡였다. 0.003초짜리 원장 기록. 금액은 $0.01. 그러나 지난 72시간 동안 같은 패턴이 147만 번 반복됐다. 총액은 $14,700. 혼자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박수진의 눈엔 뭔가 달랐다.

이건 살아 있어.

그녀가 마주페이 사기탐지팀에 합류한 건 6년 전이었다. 금융공학 석사, 전직 검찰 디지털포렌식 팀원, 그리고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직감. 패턴을 보는 눈. 숫자들이 거짓말하는 방식을 읽는 능력.

그 직감이 지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계좌는 존재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았다.

마주페이 결제 네트워크의 중간 처리 레이어, 일명 ‘클리어링 버퍼’라고 불리는 구간엔 수백만 개의 임시 계좌가 매 초 생성되고 소멸한다. 정상이다. 그런데 이 계좌들은 소멸하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는, 소멸하는 척하면서 다른 형태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박수진은 코드를 뒤집었다. 계좌 ID 생성 알고리즘을 분석했다. 세 시간 뒤, 그녀는 의자에서 천천히 등을 세웠다.

“유령 망이야.”

누군가 마주페이의 내부 API 키를 알고 있었다. 클리어링 버퍼의 생애 주기를 꿰뚫고 있었다. 계좌를 만들고, 쓰고, 지운다. 추적할 수 없게. 단, 소수점 셋째 자리의 반올림 오차를 제외하면.

이 오차가 그녀에게 꼬리를 내줬다.


박수진은 오전 9시, 직속 상관 이승호 팀장에게 보고서를 들고 들어갔다.

“총 노출액이 얼마야?” 이승호는 서류를 훑으며 물었다.

“현재 확인된 것만 340만 달러입니다. 하지만 이 구조가 6개월 전부터 작동하고 있었다면—”

“얼마?”

박수진은 숨을 들이켰다. “최소 2억 달러.”

이승호의 얼굴이 굳었다. 창밖으로 서울 도심이 아침 햇살 속에 반짝이고 있었다.

“내부 소행이야?” 그가 낮게 물었다.

“API 키가 내부에서 발급된 것들입니다. 최소 3개 팀이 접근 가능한 등급이에요.”

이승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서류를 덮었다.

“수진 씨, 이건 네가 혼자 들고 가면 안 되는 사안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고하러 온 거고요.”

“아니.” 그가 눈을 맞췄다. “내 말은, 지금 당장 금융관리청이나 국가수사청에 가져가면 안 된다는 뜻이야. 우리가 먼저 정리해야 해.”

정리. 그 단어가 박수진의 귀에 차갑게 걸렸다.


그날 저녁, 박수진은 한강변 벤치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는 모르는 번호였다.

“박수진 조사관님이시죠.”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클리어링 버퍼 분석 보고서, 직접 삭제하세요. 당신 가족도 있잖아요.”

전화는 끊겼다.

그녀는 한동안 강물을 바라봤다. 손이 떨렸다. 그러나 마음속 어딘가에서 또 다른 떨림이 일고 있었다. 분노.

나한테 이런 전화가 오는 거라면, 내가 제대로 된 길을 밟고 있다는 뜻이야.


박수진은 밤새 계좌 체인의 종착지를 파고들었다. 유령 계좌들이 최종적으로 수렴하는 지점이 있었다. 국제페이먼트와 마주페이 사이의 국경간 정산 채널. 규제 사각지대.

돈은 거기서 ‘증발’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 어딘가의 실계좌로 분배됐다. 추적하려면 국제페이먼트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협조 요청을 승인할 수 있는 사람은 이승호였다.

다음 날 아침 박수진은 이승호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국제페이먼트에 공조 요청 올리겠습니다.”

이승호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수진 씨, 마주페이 지금 IPO 준비 중인 거 알지?”

“알고 있습니다.”

“이게 터지면 상장 날아가. 수천 명 직원 스톡옵션 다 날아가. 너 포함해서.”

박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승호는 한숨을 쉬었다. “내부에서 먼저 처리하는 방법이 있어. 조용히. 피해자들한테 보상하고. 구멍 막고. 아무도 몰라.”

“피해자들이 알아야죠.”

“피해자들은 이미 마주페이 서비스 이용하면서 이용약관 동의했어. 법적으론—”

“법적으로가 아니라 맞는 일이냐고 묻는 겁니다, 팀장님.”


침묵이 사무실을 채웠다. 이승호는 창가로 걸어갔다.

“나도 알아,” 그가 낮게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 수진 씨.”

그 말이 박수진에겐 예상 밖이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무섭지. 이 회사에 내 15년이 묶여 있어. 처자식도 있고.” 그가 돌아봤다. 눈가가 붉었다. “하지만 넌 달라. 넌 아직 져줄 이유가 없잖아.”

박수진은 그 말의 무게를 천천히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 금융관리청 사이버금융조사국에 익명 제보가 접수됐다. 제보자는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첨부된 로그 파일은 147페이지였고, 계좌 추적 체계도는 손으로 직접 그린 것처럼 정밀했다.

박수진은 퇴직서를 썼다. 제출은 하지 않았다. 아직.

그날 밤, 그녀는 다시 모니터 세 개 앞에 앉았다. 클리어링 버퍼는 조용했다. 누군가 구멍을 막기 시작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조심하기 시작한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커피를 마셨다.

숫자들은 절대 거짓말을 감추지 못해. 시간이 좀 걸릴 뿐이야.

모니터 한구석에서 새로운 붉은 점이 깜빡였다.

박수진은 로그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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