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7 · Vol. III · No.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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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
GLOBAL

ESG 회계의 날

데이터 조작의 구조를 파헤치는 이야기

· 3분 읽기 · #스토리#스릴러

박지윤이 그 숫자를 처음 발견한 건 11월의 흐린 화요일 오전이었다.

한빛소재 지속가능경영팀장으로 부임한 지 3년 차. 그는 에버그린레이팅이 보내온 갱신 설문지를 채우다 멈췄다. 폐수 처리 비용 항목에서 회사가 제출한 수치와 환경부 배출량 공개 데이터 사이에 4,300톤의 간격이 있었다.

처음엔 단순 집계 오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년치 데이터를 추적하자 패턴이 보였다. 매년 에버그린레이팅에 제출하는 수치가 실제 규제 보고치보다 일정 비율 낮게 집계됐다. 어떤 해엔 탄소 배출량이, 어떤 해엔 수계 오염 지수가. 그 오차는 우연이 아니었다.

에버그린레이팅은 한빛소재에 ESG 종합 점수 83점을 부여하고 있었다. 업계 상위 12퍼센트. 공적 연기금과 대형 운용사들이 한빛소재를 ESG 적격 종목으로 분류하는 근거였다. 주가는 지난 2년간 ESG 프리미엄에 힘입어 42퍼센트 올랐다.

박지윤은 에버그린레이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다. 평가 수수료는 기업이 낸다. 컨설팅 부문과 평가 부문이 법인 분리돼 있긴 하지만 같은 지붕 아래 있다. 한빛소재 IR팀은 매년 이 회사의 개선 컨설팅을 구매했다. 어떤 항목에 어떤 데이터를 강조하면 점수가 오르는지 유료로 배우는 것이다. 박지윤 자신도 그 세미나에 두 번 참석했다.

국제 학술지에 발표된 한 연구는 주요 ESG 평가사 간 동일 기업에 대한 점수 상관계수가 0.54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신용평가사들의 0.99와 대조적이다. 방법론이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방법론이 다르면 결론도 다르고, 방법론이 공개되지 않으면 기업은 가장 유리한 평가사를 고르면 된다. 실제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박지윤 앞에 있는 건 방법론의 차이가 아니었다. 데이터 조작이었다.


그는 먼저 내부적으로 보고하기로 했다.

CFO 한재원은 서류를 훑어보고 침묵했다.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물었다.

“이걸 외부에 낸 적 있어?”

“없습니다.”

“다행이네.”

박지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즉시 이해했다.

이사회 전략위원회 긴급회의는 사흘 뒤 열렸다. 박지윤은 배석하지 못했다. 대신 회의 다음날 오전, 법무팀장이 그의 사무실에 찾아왔다. 내부 제보 채널을 통한 보고는 법적 보호를 받지만, 만약 언론이나 외부 기관에 먼저 나간다면 기밀 유출에 해당할 수 있다는 내용을 정중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설명했다.

그즈음 청명파트너스가 지분 7.2퍼센트로 주요 주주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행동주의 펀드였다. 그들은 한빛소재에 두 가지를 요구했다. 자사주 소각과 ESG 위원회 외부 인사 확충. ESG를 무기로 쓰는 건지 방패로 쓰는 건지 박지윤은 헷갈렸다. 어쩌면 둘 다였다.

대광자산운용 쪽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다. 이 펀드는 운용 자산 12조원 중 상당수가 ESG 스크리닝 기반 상품이었다. 내부 규정상 ESG 종합 점수 75점 미만 종목은 편입 제한이 걸린다. 만약 한빛소재의 점수가 정정된다면 의무 매도가 발생한다. 하지만 대광자산운용의 채권 포트폴리오엔 이미 한빛소재 회사채가 2,800억원어치 들어 있었다. 주가가 흔들리면 채권 가격도 내려간다. 그 채권 상당수는 퇴직연금 상품에 편입돼 있다.

4만 명의 직원과 퇴직자. 박지윤은 그 숫자를 생각했다. 숫자는 너무 컸다.


언론은 다른 경로로 냄새를 맡았다.

경제지 기자 한 명이 환경부 공개 데이터와 ESG 보고서 수치의 불일치를 세 개 기업에 걸쳐 분석한 탐사보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빛소재는 그 세 곳 중 하나였다. 기자는 박지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공식 입장을 요청하는 형식이었지만 사실 확인이기도 했다.

박지윤은 이틀 동안 답장을 쓰지 않았다.

그는 세 가지 선택지를 종이에 적어봤다. 침묵하고 남는다. 조용히 사직한다. 증거를 들고 나간다. 어느 쪽을 골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다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어느 쪽을 골라도 이미 저질러진 일은 저질러진 것으로 남는다.

책상 서랍에는 USB가 하나 있었다. 3년치 내부 데이터와 외부 제출 수치를 병렬 정리한 파일이 들어 있었다. 만든 것은 박지윤 자신이었다. 삭제하지 않은 것도 박지윤 자신이었다. 그 사실이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시장은 빠르게 수정되지 않는다.

잘못된 정보가 가격에 녹아 있을 때, 그 정보를 올바로 아는 주체들이 정정에 나서려면 비용을 치러야 한다. 기관투자자는 규정에 묶여 있다. 평가사는 수익에 묶여 있다. 이사회는 책임에 묶여 있다. 그 사슬들이 서로를 잡고 있는 동안 가격은 계속 그 자리에 있다.

아무도 나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이 문제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박지윤은 창문 밖을 바라봤다. 11월의 하늘이었다.

USB는 아직 서랍 속에 있었다.


본 글은 허구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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